여울은 아침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청록빛 털은 물에 비친 달처럼 옅었고, 머리 위에는 작은 빛의 고리가 떠 있었다. 등에 붙은 날개도 반투명했다. 그러나 관리소의 낮은 문을 지날 때는 다른 여우들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는 여울이야. 오래전부터 이곳의 길을 돌보았어.”
토리는 곧장 지도를 펼치려다 새별을 보았다. 새별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등까지 가는 길을 아세요?”
여울은 멀리 있는 돌섬들을 보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 어젯밤 돌아와 보니 없어진 길이 많더구나.”
여울은 길을 안다고 대답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잠깐 바라보았다. 토리는 책 속 그림에서 나온 친구를 만났으니 당연히 모든 길이 연결될 것처럼 기대하고 있었다. 여울의 손에는 오래된 돌가루가 묻어 있었다. 반투명한 날개가 있어도 이곳을 살피다 손을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둥글 박사님 방에 여울이 그려져 있었어요. 아리랑 새벽새도 같이 있었고요.” 노을이 말했다. 여울은 그 그림이 아직 남아 있느냐며 눈을 크게 떴다. 토리는 그림 속 여울은 조금 더 키가 커 보였다고 했다. 여울은 화가가 자기를 멀리서 봐서 발밑 돌까지 다리로 그렸을지도 모른다고 웃었다.
반짝이는 여울의 머리 위 고리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몸처럼 빛이 나는데도 물건을 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여울은 손끝을 고리 쪽으로 올렸다가 그대로 내렸다. “모자를 걸어 둘 곳으로 쓰기에는 알맞지 않아. 모자는 다른 친구들처럼 옷걸이에 두지.” 토리는 어제 본 루온의 모자를 떠올리고 웃었다.
새별은 여울에게 지금까지 확인한 지도를 보여 주었다. 여울은 한눈에 알아보는 곳도 있었지만 이름을 다시 읽는 곳도 있었다. 오래된 쉼터 옆에 새 관리소가 생겼고, 물을 모으던 자리에 다른 관이 이어져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에는 없던 표시들이 많구나. 먼저 설명을 듣고 걸어야겠어.”
노을은 여울이 곧장 앞장서지 않는 것을 보았다. 여울은 새별이 짚는 자리를 하나씩 확인하고 때로는 설아에게 높이를 물었다. 오래 이곳을 지켰다는 소개와 지금 다른 친구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가, 생각해 보니 둘 다 길을 돌보는 일이었다.
토리는 자신의 지도를 보여 주면 오래된 기록에 비해 너무 어린 그림 같을까 봐 망설였다. 여울은 가장자리의 작은 껍데기를 보고 누구의 집인지 물었다. 토리는 집순이를 소개했다. 여울은 그 친구가 본 길이라면 자신이 위에서 본 것과 다른 부분이 있겠다고 말했다.
관리소 문밖에서는 뭉게가 이슬을 머금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여울은 그쪽 날씨를 살피고 오늘 가 볼 곳을 몇 군데로 줄였다. 노을은 빛나는 날개가 펼쳐지면 곧바로 다리를 건너갈 줄 알았지만, 여울이 먼저 찾은 것은 이곳에서 빌려 쓸 수 있는 긴 지팡이였다.
노을은 여울이라면 손을 한 번 움직여 새 다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책 속 정령은 대개 그랬다. 하지만 여울은 관리소에서 긴 지팡이를 빌리고, 오래된 길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뭉게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따라왔다. 설아와 새별은 아이들보다 앞에서 난간을 점검했다. 여울은 손바닥에 빛을 모아 돌바닥에 남은 옛 홈을 비추었다.
연한 선이 나타났다. 선은 절벽 끝으로 이어지다가 공중에서 끊겼다.
여울은 멈췄다.
“여기에 다리가 있었어. 오른쪽 섬으로 이어졌는데.”
그녀가 지팡이를 내밀자 끝이 허공을 갈랐다. 빛으로 남은 길의 자국은 보였지만, 발을 디딜 돌은 없었다.
토리가 지도에 선을 그으려다가 점으로 바꾸었다.

“이건 옛길이라고 적을게요. 지금 길이랑 색도 다르게 하고요.”
여울은 오래된 표식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내가 떠나기 전에는 이쪽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녔어. 너무 익숙해서 다시 보지 않았구나.”
노을이 물었다.
“길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남은 길을 찾아 밝히는 건 할 수 있어. 없어진 받침과 돌을 한 번에 되돌릴 수는 없단다. 다른 친구들의 손과 재료가 필요해.”
여울의 말은 아쉬웠지만, 덕분에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여울은 지팡이를 거두고 절벽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노을도 발을 뒤로 옮겼다. 남은 홈을 따라 빛이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길처럼 보였지만, 여울의 손은 오래된 표식에 조금 더 머물렀다.
“저기 건너편에는 낮은 의자가 있었어. 쉬어 가는 사람마다 하나씩 손봐서 다리 모양이 전부 달랐지.” 여울이 말했다. 토리는 지도에 의자를 그리려다가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가까이 가서 봐야 알겠구나. 내가 방금 말한 건 예전에 앉았던 의자 이야기야.” 여울은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거기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자꾸 지금 있는 것처럼 말하게 돼.”
노을은 집 대문 옆의 낮은 돌을 떠올렸다. 엄마를 기다릴 때마다 앉던 돌이었다. 길을 그릴 때는 빼도 되겠지만, 집 이야기를 할 때는 빠뜨리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토리는 별도의 작은 종이에 의자 모양을 그렸다. “찾으면 지금 그림 옆에 붙일게요. 없어졌어도 예전 그림을 버리지는 않을 거고요.” 여울은 다리가 제각각이라는 부분을 한 번 더 설명해 주었다.
새별이 다음 점검 지점에서 불렀다. 여울은 옛 표식을 마지막으로 보고 돌아섰다. 이번에는 기억 속 다리가 아니라, 지금 발을 놓을 수 있는 돌을 따라 아이들과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일행은 옛길을 따라 뛰어가는 대신 현재 남아 있는 돌섬들을 돌아보았다. 토리는 아래에서 가져온 지도의 가장자리에 새 종이를 붙였다. 여울은 기억나는 우물과 쉼터를 알려 주었고, 새별은 실제로 있는 곳에만 표시했다.
첫 번째 쉼터에는 둥근 우물이 남아 있었다. 여울이 기억하던 낮은 지붕은 없고 새로 덮은 천이 바람에 움직였다. 새별은 우물 가장자리가 단단한지 확인한 뒤 물을 길어 쓰는 사람이 있는지 관리 기록을 보았다. 토리는 그림에서 지붕을 지우는 대신 옆에 지금의 천을 그렸다.
“내가 기억하는 물소리와는 달라.” 여울이 말했다. 예전에는 우물 곁의 돌 홈으로 물이 조금씩 흘렀는데 지금은 다른 통으로 모이고 있었다. 노을은 달라진 것이 모두 부서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친구들이 살면서 바꾼 자리도 있었다.

두 번째 돌섬으로 가는 길에서는 작은 깃발이 보였다. 점검한 곳을 표시하는 최근 표지였다. 설아는 그 표지를 보고도 오늘 눈으로 확인해야 할 부분을 살폈다. 토리는 여울의 기억과 새별의 기록, 눈앞의 돌이 서로 다른 시간의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노을은 그 이야기를 맞추느라 걷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 같다고 했다.
뭉게는 낮은 가지를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여울이 예전에는 나무가 훨씬 작았다고 하자 뭉게는 자기가 오기 전부터 이만했다고 답했다. 둘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같은 나무를 두고도 아주 오래전과 어제의 기준이 달랐다. 토리는 나무가 자기 나이를 말해 주면 편하겠다고 중얼거렸다.
노을은 여울에게 길을 돌보면서 가장 좋아했던 자리를 물었다. 여울은 아까 말한 의자뿐 아니라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을 멀리 볼 수 있는 작은 돌턱도 좋아했다고 했다. “돌아오면 먼저 알아보려고 거기 앉곤 했어.” 노을은 엄마가 집 창문에서 골목을 보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토리는 그 돌턱을 지도에 표시하려다가 지금 갈 수 있는지 먼저 물었다. 여울은 오늘 확인할 길 밖이라 표시만 남겨 두자고 했다. 노을은 궁금한 곳이 생길 때마다 모두 가 볼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다시 올 이유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조금 덜했다.
다음 높은 자리에서는 깨진 별등의 아래쪽이 더 잘 보였다. 반짝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낮은 돌섬을 향해 움직였다. 새별이 가까이 갈 수 있는 선을 알려 주자 그 자리에서 멈췄다. 작은 별의 시선이 유리 껍질이 아니라 아래의 둥근 금속 고리에 머물렀다.
반짝이는 깨진 별등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저 돌섬에는 정박 고리가 있었어. 큰 배는 아니고… 아리가 쉬던 곳이야.”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별고래를 기억하니?”
“저녁마다 지나가는 걸 봤어. 길이 밝아지면 밑에서 올라왔어.”
뭉게가 구름 한쪽을 털었다.
“지금도 있어. 다만 저쪽에 멈춰 있어. 가끔 낮게 우는데, 밤에는 여기까지 들려.”
여울은 돌섬 아래의 긴 그늘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구름처럼 보이던 것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커다란 고래의 등이었다.
아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끊긴 빛길 앞에서 다음 길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래를 타고 가면 되겠네!”
토리의 말에 여울은 고개를 저었다.
“아리는 아무 데로나 헤엄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몸을 받쳐 주는 빛의 길이 있어야 해. 지금은 정박지에서 별등까지 이어지는 짧은 구간조차 끊겨 있어.”
새별이 지도를 보았다.
“여섯 번째 문의 열을 낮추고 우회관을 연결했으니, 짧은 구간만 먼저 밝히는 시험은 가능해요. 다섯 번째 문과 시간을 맞추면.”
토리는 정박지까지 남아 있는 돌길을 그렸다. 일행이 건넌 길은 굵게, 아직 살펴야 할 부분은 점으로 남겼다.
노을은 지도 모서리가 무릎 밖으로 길게 늘어진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빵집만 크게 그렸는데.”
토리는 웃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빵집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여기 돌아오면 또 그릴 거야.”
“응. 다만 이번에는 우리 집도 육지에 있어야 해.”
그제야 토리가 웃었다.
긴 지도를 접으려니 처음 바닷가를 그린 쪽이 자꾸 밑으로 빠졌다. 노을이 그 끝을 받쳤다. 가장 오래된 종이는 여러 번 접힌 자리가 부드러워져 있었고, 새 종이는 아직 빳빳했다.
“처음 그림은 지금 그림보다 못 그렸어.” 토리가 말했다. “집도 비뚤고 바다는 너무 좁고. 다시 그려 붙이면 더 알아보기 좋을 텐데.”
노을은 빵집 그림 옆에 남은 얼룩을 보았다. 처음 여행할 때 가방 속 빵에서 묻은 흔적 같았다. “새 지도는 새로 그리면 되지. 나는 이쪽도 남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처음에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몰랐는지 보이니까.”
반짝이가 종이 끝으로 내려왔다. “여기 작은 점이 나야? 처음 봤을 때는 해초 덩어리라고 했잖아.” 토리가 급히 점 옆에 다섯 모서리를 그리려 하자 반짝이가 웃었다. “그대로 둬. 그때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
여울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오래된 길을 기억하는 자신만 이 지도에 과거를 보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지나온 며칠도 이미 여러 번 고쳐 읽을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토리는 찢어지기 쉬운 첫 장을 안쪽에 넣어 접었다. 새로 붙인 하늘길이 가장 바깥으로 나왔다. 지도가 커졌다는 것은 빈칸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보이는 곳이 더 많아졌다는 뜻 같았다.
관리소로 돌아가기 전에 일행은 바람이 약한 돌벽 안쪽에서 쉬었다. 아리의 등이 먼 그늘 속에서 한 번 움직였다. 토리는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손으로 재려다가 손가락 사이에 너무 작게 들어온다며 포기했다. 가까이 서면 자기 그림이 얼마나 작았는지 알게 될 것 같았다.

“아리는 기다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할까요?” 노을이 물었다. 여울은 직접 물어봐야 알겠다고 답했다. 토리는 자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 늘어난다고 했다. 여울은 그래서 길을 고치고 싶은 마음에도 여러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빨리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만나서 듣고 싶은 말도 있었다.
반짝이는 처음 떨어졌을 때 바닷가에서 어떤 방향으로 날아야 할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제는 집이 눈앞에 보여도 바로 갈 수 없었다. “멀리 있을 때는 가까이만 가면 될 줄 알았어.” 노을은 자기도 등대까지만 가면 답이 끝날 줄 알았다며 웃음 아닌 짧은 숨을 내쉬었다.
여울은 두 친구를 보며 자신도 기억 속 길을 따라가면 옛 모습이 기다릴 줄 알았다고 했다. 토리는 오래 산 친구도 같은 기대를 하느냐고 물었다. 여울은 오래 기억한 것일수록 바뀐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고 답했다. 노을은 반짝이에게 빨리 괜찮아지라고 말하지 않기로 한 마음을 다시 떠올렸다.
설아가 물을 나눠 주자 토리는 지도를 잘 접은 덕분에 손이 비었다고 말했다. 노을은 가끔 지도도 쉬어야 다음에 잘 펼쳐진다고 했다. 토리는 사람처럼 말하느냐며 웃었지만 종이를 가방 안의 마른 자리에 넣었다. 반짝이는 날아온 바람에 작은 천을 고쳐 들었다.
뭉게는 돌아가면 자기가 좋아하는 풀밭에서 이슬을 더 머금을 생각이라고 했다. 여울은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물었다. 뭉게가 관리소 처마 옆을 가리키자 여울은 자신의 오래된 지도에는 아무 이름도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토리는 그럼 지금은 뭉게의 쉬는 자리라고 부르면 되겠다고 했다.
일행이 일어났을 때 돌섬 그림자는 조금 더 길어져 있었다. 새별은 관리소에 전할 점검 내용을 정리했고 설아는 돌아갈 길의 앞부분을 살폈다. 여울은 토리의 가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래된 기억을 말한 뒤에는 오늘 함께 만든 그림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여울은 새 지도를 한 번 더 보여 달라고 했다. 여울은 오래된 기억과 다른 곳마다 작은 메모를 붙였다.
“내가 아는 길을 고쳐 적는 건 처음이구나.”
노을은 여울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령은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모서리를 접었다.
“길이 아직 변하고 있다는 걸 직접 보니 다행이야. 나는 모든 것이 끝난 자국만 남았을까 봐 걱정했거든.”
관리소에 돌아왔을 때 새 손님이 와 있었다.
금빛 털과 무거운 왕관. 임금 금오는 탁자 앞에 서서, 노을 일행이 가져온 찌그러진 깡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