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종을 녹이는 데에는 반나절이 걸렸다.
토리는 따뜻한 물에 넣으면 빨리 끝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설아는 깨진 유리가 갑자기 온도를 바꾸면 더 갈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원판을 얕은 쟁반에 놓고 숙소 안에서 천천히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
쟁반 가장자리로 맑은 물이 조금씩 모였다. 은빛 원판의 둥근 선은 보였다가 물결에 가려졌다. 토리는 얼음이 녹는 동안 지켜보고 있으면 더 빨리 끝날 것 같았지만, 의자에 앉아 세 번이나 자세를 바꾸어도 모양은 거의 같았다. 뒤뚱은 아침 그릇을 치울 자리를 내 달라고 했다.
“이 안에 목소리가 있다는 게 잘 안 믿겨. 소리는 말하면 금방 없어지잖아.” 노을이 말했다. 설아는 빛의 무늬로 남겨 다시 소리로 바꾸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토리는 그렇다면 깨진 부분에서는 말이 빠질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설아는 상태를 봐야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반짝이는 왕관 표식이 보이는 쪽을 바라보았다. 노을은 작은 별이 무엇을 기억할지 기다렸다. 반짝이는 이번에는 말할 것이 더 떠오르면 바로 알리겠다고 했다. 노을은 고개를 끄덕인 뒤 쟁반만 함께 보지 않고 자신의 질문 종이도 꺼냈다. 한 친구가 모든 답을 기억해 내길 기다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말랑은 물이 바닥에 흐르지 않게 천을 가져왔다. 어제 상자를 떨어뜨린 일을 말하지 않았다면 원판도 찾지 못했을 거라고 토리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말랑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찾은 건 다행이지만, 내가 미룬 일이 잘한 일이 되는 건 아니야. 그 둘은 나도 섞고 싶지 않아.”
뒤뚱은 원판 아래에 놓인 천을 바꾸고 옆의 고리 상자를 확인했다. 고리는 오늘 수리에 쓸 수 있도록 말려 두었다. 노을은 같은 상자에서 나온 두 물건이 서로 다른 일을 기다리는 모습이 신기했다. 하나는 문을 고칠 재료였고, 다른 하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단서였다.
토리는 기록을 들을 때 모두 같은 말을 적을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설아는 들리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으니 먼저 각자 적고 비교해 보자고 했다. 노을은 긴 말이 나오면 다 따라 쓰지 못할 것 같았다. 토리는 문장을 모두 쓰기보다 들은 단어를 남겨도 나중에 맞춰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방이 따뜻해질수록 신발에 남아 있던 눈도 녹았다. 뒤뚱은 아이들에게 젖은 물건을 한곳에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토리는 원판이 혼자 있는 동안 갑자기 말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설아가 축을 돌리기 전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그제야 의자에서 일어나 젖은 장갑을 챙겼다.

기다리는 동안 말랑은 창고를 한 번 더 정리했다. 뒤뚱은 문 수리에 쓸 재료를 묶었다. 노을과 토리는 새별에게 전할 질문들을 종이에 썼다.
반짝이도 자기 종이를 꺼냈다.
‘경고를 늦게 알린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함.’
한 줄을 쓰고 나서 반짝이는 노을에게 보였다.
“이것도 적어야 할 것 같아. 어제 이야기할 때는 얼마 안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사실 오래였을 수도 있어.”
노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적자.”
대단한 화해의 말은 아니었지만, 반짝이는 그 종이를 더 감추지 않았다.
토리는 쟁반 옆에 앉아 얼음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았다. 원판이 조금 더 드러날 때마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글자 한 줄이 보였지만 끝은 아직 얼음 속에 있었다.
“여기에 답이 다 들어 있으면 좋겠다. 누가 언제 문을 닫았는지, 왜 안 열었는지까지.” 토리가 말하자 설아는 마른 천을 바꾸며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없어진 소리까지 돌려주지는 못해.”
노을은 질문 종이를 세 장으로 나누었다. 기록에서 들을 수 있는 것, 새별에게 물을 것, 반짝이가 기억하는 것이었다. 반짝이는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가져와 방금 쓴 문장을 올려놓았다.
“소리가 내 기억하고 다르면 어떡하지? 내가 또 거짓말했다고 생각할까 봐 무서워.”
노을은 쉽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고 질문을 읽었다. “다르게 들리면 어디가 다른지 물어볼게. 네가 지금 모른다고 적은 것도 같이 볼 거고. 대신 나한테 맞는 답을 고르려고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반짝이는 종이 아래쪽에 아직 떠오르지 않는 시간의 자리를 비워 두었다. 노을도 그 빈칸을 채워 주지 않았다. 두 친구가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 동안, 얼음 속에 가려져 있던 날짜의 마지막 숫자가 드러났다.
얼음이 다 녹자 설아는 은빛 원판을 천으로 닦았다. 기록종은 말소리를 얇은 빛의 무늬로 남기는 오래된 장치였다. 가운데 축을 일정하게 돌리면 마지막으로 저장된 소리가 다시 울렸다. 날짜와 담당자의 표시가 가장자리 눈금에 함께 새겨져 있었다.
토리가 축을 만지려 하자 설아가 먼저 끊어진 부분을 확인했다.
“원본이 망가지면 다시 들을 수 없어. 내가 돌릴 테니 너희는 들리는 대로 적어 줘. 잘 안 들린 곳은 비워 두고.”
첫 번째 소리는 바람이었다. 그 다음은 이름을 밝히는 낮은 목소리였다.
‘다섯 번째 문, 폭풍 관측. 하늘의 지시로 상층 귀환문을 임시로 닫음. 아래쪽 시설은 순서대로 빛을 줄일 것.’
노을은 반짝이를 보았다. 반짝이는 도망치지 않고 원판 앞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기록에는 다른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다섯 번째 문 온도 상승. 돌려보낸 빛이 되밀림. 상층에 잠금 해제 여부 확인 요청.’
잡음이 길게 이어졌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도 났다.
세 번째 목소리는 조금 더 급했다.
‘확인 회신 아직 없음. 아래쪽 물길로 일부 빛을 빼냄. 계속 가두면 관이 버티지 못함. 상층에 다시—’
소리가 끊겼다.
토리의 연필도 멈췄다. ‘다시’ 다음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뒤뚱이 입을 열었다.
“그날 우리 물이 갑자기 따뜻해졌어. 얼음이 녹아서 창고 문턱까지 들어왔지. 나는 폭풍 때문인 줄 알았어.”
설아는 원판의 날짜를 확인했다. 별등이 깨진 날과 같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누가 확인 요청을 받았고, 어디서 답이 멈췄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을이 반짝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가 말하지 않아서 아무도 몰랐던 건 아니었네.”
반짝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응.”
아주 작은 대답이었다. 어깨에 쌓여 있던 눈 한 겹이 녹는 듯했지만, 곧 다른 무게가 남았다.
“그렇다고 내가 안 말한 게 없어지진 않아. 나는 그 방에 있었으니까. 바로 불렀으면 누가 더 빨리 피할 수도 있었을 거야.”
설아는 기록종을 상자에 넣었다.
“맞아. 네 몫은 분명히 남아 있어. 그렇지만 어른들이 받아야 했던 경고와 해야 했던 일까지 네가 떠안을 필요는 없어.”
노을은 그 차이를 생각했다. 용서한다는 말로 모든 일을 덮을 수도 없고, 한 사람만 탓한다고 깨진 길이 붙는 것도 아니었다.
토리는 들리는 대로 적은 종이를 설아에게 건넸다. 비워 둔 자리에 연필 자국이 움푹 남아 있었다. 마지막 목소리가 끊길 때 힘을 준 탓이었다.
“그 사람은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요? 계속 두드리는 소리가 났는데.”
설아는 종이를 접지 않고 기록종 옆에 놓았다. “그것도 확인해 보자. 목소리가 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사하다고도, 다쳤다고도 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담당자 표식을 따로 베껴 새별에게 물을 목록에 보탰다.
뒤뚱은 창고 문턱에 물이 들어왔던 날, 젖은 물건을 위로 올리느라 밤새 불을 켰다고 말했다. 말랑은 호수의 물이 이상하게 미지근해서 다른 웅덩이로 옮겨 갔다고 했다. 같은 밤이 두 친구에게는 서로 다른 일로 남아 있었다.
노을은 바닷가에서 젖은 반짝이를 처음 안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작은 별 하나가 떨어진 일만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여러 섬에서 사람들이 제각기 물을 퍼내고 불을 살피고 기다렸다는 것이 조금씩 이어졌다.
반짝이는 원판 상자를 닫는 설아에게 말했다. “저 목소리를 남긴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나도 듣고 싶어. 내가 몰랐던 일을 말해 준 사람이니까.” 설아는 그 부탁도 질문지의 마지막 줄에 적었다.
노을은 자기가 적은 종이와 토리의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두 번째 목소리의 같은 부분에 서로 다른 글자가 있었다. 설아는 알아듣기 어려웠던 곳을 표시하고 중요한 문장은 조심스럽게 다시 확인했다. 한 번 들은 말이 종이에 적혔다고 곧바로 완전한 문장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잠깐’이라고 들었는데 토리는 ‘잠금’이라고 썼어.” 노을이 말했다. 토리는 앞의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설아는 분명히 들리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었다. 질문지에는 새별과 원본을 함께 확인해야 할 문장이 남았다.

반짝이는 자기 종이를 들어 노을 쪽으로 보여 주었다. ‘귀환문 잠금 유지’라는 글씨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이었다. 노을은 소리에서 들은 말과 별이 본 글씨를 같은 줄에 억지로 합치지 않았다. 둘이 같은 상황을 가리키는지 확인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비슷하다는 이유로 바로 선을 이었을지도 몰랐다.
말랑은 창고 문턱에 물이 들어왔던 높이를 손으로 짚었다. 뒤뚱은 그보다 높은 선반까지 물건을 옮겼다고 했다. 노을은 그날 밤 반짝이가 떨어진 것을 본 뒤 세상이 이렇게 넓게 흔들렸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작은 바닷가 밖에서 겪은 일들이 이제 같은 날짜에 모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말을 했으면 전부 안 깨졌을 거라고 생각했어.” 반짝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섭지만, 이유가 하나라서 쉬운 것 같기도 했어.” 노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가 하나면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도 쉽게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눈앞의 종이는 한 줄로 끝나지 않았다.
뒤뚱은 빈 찻잔을 따뜻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설아는 지금 알아낸 것만으로도 하늘 관리소에 다시 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짝이는 아직 자기 책임이 남아 있어도 모든 것을 혼자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을은 그 옆에서 새 질문을 한 줄 더 적었다.
수리할 재료를 들고 나갈 시간이 되자 토리는 종이들을 천 주머니에 넣었다. 기록종은 설아가 따로 맡았다. 노을은 오늘 들은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끊긴 순간을 마음속에서 반복했다. 그 뒤를 자기 상상으로 채우기보다 다음에 물을 질문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저녁 전에 다섯 번째 문을 다시 살폈다. 뒤뚱과 설아가 새 고리를 끼우고, 말랑이 물 아래의 작은 방출구를 청소했다.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음에 눌려 있던 관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지막 손잡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덮개 안에 따로 잠긴 걸쇠가 있었다. 그 위에는 왕관 표식과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섯 번째 문에서 하늘 계단으로 나가는 빛은 왕실 관리소의 확인이 있어야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토리가 입술을 내밀었다.
“다 고쳐도 허락이 없으면 못 가는 거예요?”
설아는 부품을 덮었다.
“지금은 그래. 하지만 열어 달라고 말할 근거는 생겼어. 고친 곳과 남은 위험을 정확히 전하자.”
토리는 걸쇠에 새겨진 숫자를 베껴 적었다. 왕관만 같은 물건이 여러 개라면 어느 문인지 정확히 알려야 했다. 설아는 보고서에 붙일 그림의 방향을 확인해 주었다. 뒤뚱은 새 고리가 잘 끼워진 곳을 다시 살피고 덮개를 닫았다. 오늘 고친 부분과 아직 열지 못한 부분이 같은 문 안에 함께 남았다.
“왕실 관리소에 가면 이 잠금을 푸는 열쇠가 있겠죠?” 노을이 물었다. 설아는 필요한 허가와 점검 절차를 확인해야 한다고 답했다. 열쇠 하나를 가져오는 일인지, 위쪽에서 먼저 준비할 일이 있는지도 아직 몰랐다. 토리는 또 모른다는 말이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뒤뚱은 토리의 공책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는 고리를 어디에 끼울지도 다시 봐야 했어. 지금은 그 부분이 맞는 건 알아. 내일 모르는 것도 오늘이랑 똑같지는 않을 거야.” 토리는 고친 고리 그림 옆에 날짜를 적었다. 빈칸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반짝이는 얼음벽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내려오기 전에는 저 아래의 친구들이 문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노을은 하늘에서 보면 섬들이 얼마나 작으냐고 물었다. 반짝이는 날씨가 좋은 날에도 저마다 켜진 빛으로 구분했다고 답했다. 그 빛 아래 누가 있는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알겠네. 여기에는 뒤뚱이 있고 말랑이 있고, 저쪽에는 몽실이 있어.” 노을의 말에 반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손끝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안에는 몽실이 준 방석과 여러 섬의 조각들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동안 집 아래의 이름들이 늘어났다.
설아가 귀환 준비를 알렸다. 말랑은 물 아래에서 확인한 부분을 짧게 설명하고 뒤뚱과 재료를 정리했다. 노을과 토리는 마른 자리에 두었던 짐을 챙겼다. 얼음벽에 비친 노란빛이 손잡이를 닫자 조금 옅어졌다. 불이 줄어든 뒤에도 고친 고리는 제자리에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바람이 등을 밀었다. 올 때보다 걷기는 쉬웠지만 마음에는 새 질문들이 실려 있었다. 노을은 새별이 오면 무엇부터 물을지 순서를 바꾸었다. 토리는 오늘은 길을 그리기보다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두 친구가 굴뚝 연기를 찾으며 낮은 언덕을 넘어섰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새로운 발자국이 있었다.
빨간 머리띠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믐이 가방을 내려놓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먼지 묻은 보랏빛 망토를 입은 새별이 있었다.
노을이 달려가자 새별은 먼저 가방을 내려놓고 두 팔을 벌렸다.

반짝이는 마지막에 다가왔다.
새별이 몸을 낮추었다.
“네 기록, 받았어. 직접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이제 내가 알아낸 것도 함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