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아주 크게 보였다. 하얀 탑은 바닷바람에 한쪽만 회색으로 닳아 있었고, 탑 아래에는 빨간 지붕 세 채와 작은 텃밭이 모여 있었다. 안개는 섬 전체를 덮은 것이 아니라 북쪽 바위와 오래된 부두 사이에 고여 있었다.
“끼룩한테 정확하게 그려 보내야겠다.”
토리가 말하자 노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리는 섬을 한 장에 그리려다 종이를 옆으로 돌렸다. 등대만 크게 그리면 아래쪽 집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노을은 끼룩이 그 그림을 보면 이번에는 집이 사라졌다고 외칠지도 모른다고 했다. 토리는 탑을 조금 줄이고 텃밭까지 넣었다. 실제 섬에는 소문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었다.
로코가 배의 방향을 바꾸자 보라색 안개는 등대 뒤로 가려졌다. 불씨는 안개가 없어졌다고 했다가 곧 말을 고쳤다. 자신이 못 보게 된 것이었다. 새별은 남쪽 부두에서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지만 북쪽 길은 막혀 있다는 소식을 다시 확인했다. 노을은 같은 섬 안에서도 서로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반짝이는 돛 그늘에서 나와 하얀 탑을 보았다. 창문들이 나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노을이 몇 개냐고 물었지만 배가 움직여 뒤편 창문이 나타날 때마다 숫자가 바뀌었다. 토리는 그림에 보이는 것만 먼저 그리자고 했다. 반짝이는 가장 높은 창문이 열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씨는 가방에서 소개장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아직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봉투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노을은 자기 집으로 보낸 편지도 지금쯤 은솔의 가방에서 바닷길을 걷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불씨는 편지는 배가 흔들려도 멀미를 안 하니 좋겠다고 했다.
로코는 이제 돛보다 부두의 사람을 잘 보라고 일렀다. 누가 줄을 받을지 알아야 했다. 노란 우비가 작은 창고 앞을 오갔다. 물건을 옮기다가 배를 보고 손을 들고, 다시 놓아둔 물건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유난히 바빴다. 노을은 두 사람이 같은 우비를 입고 있는 줄 알았다.
“한 명이야.” 로코가 말했다. “저렇게 움직이면 멀리서는 셋쯤 되는 것 같지.” 토리는 자기가 지도와 가방을 찾느라 방을 돌아다닐 때도 그런 모습일지 궁금했다. 불씨는 우비 주머니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다가 다시 주워지는 것을 보았다. 손이 두 개로 모자라 보였다.
배가 가까워지자 텃밭의 양파 잎까지 보였다. 노을은 짠 바다를 건너왔는데 섬에서도 수프에 넣을 채소를 기른다는 게 반가웠다. 반짝이는 낮은 빨간 지붕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찾는 집과는 다르지만, 오늘 머물 방이 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배가 남쪽 부두에 닿자 노란 우비를 입은 여우가 밧줄을 받았다. 우비 주머니에는 나사와 분필이 들어 있었고, 모자 아래 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오시는 배가 오늘이었나요? 방은 준비됐어요. 물도 데워 두었고, 등대도 곧 다시 밝힐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우는 자기 이름도 말하기 전에 나무 상자를 들었다. 상자 아래에서 못 하나가 떨어졌다. 그가 허리를 굽히려 하자 위에 놓인 등유병이 기울었다.
로코가 병을 받았다.

“해루, 물건도 인사도 한 번에 하나씩 하면 어떻겠니?”
해루는 등대지기 견습생이었다. 이곳을 오래 지켜 온 갈매기 할머니와 함께 살며 부두와 등대의 일을 배웠다.
할머니는 아래층 창문에서 손을 흔들었다. 며칠 전 폭풍 때 날개를 삐어 아직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우렁찼다.
“차부터 마셔! 우리 해루가 차를 마신다고 하면 일까지 마셔 버릴 기세야!”
해루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상자를 다시 들었다.
새별이 그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에 상처 났어요. 상자는 제가 옮길게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제가 원래 좀 잘 긁혀서요.”
해루는 웃었지만 손을 주머니에 감췄다. 노을은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해루가 계단 쪽을 살피는 것을 보았다.
노을은 자기 가방만 먼저 내려놓았다. 새별이 상자를 받아 들자 해루의 빈손이 어색하게 허공에 남았다. 해루는 곧 다른 짐을 찾듯 부두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 방은 어느 쪽이에요? 데려다주기만 해도 돼요. 가방은 내가 들 수 있어요.” 노을이 말하자 해루는 계단 아래의 파란 문을 가리켰다. 손님 방에는 침구가 가지런했지만, 의자 위에는 해루의 젖은 수건과 식다 만 찻잔이 놓여 있었다.
토리가 찻잔을 옮기려다가 물었다. “이건 아직 마시는 중이에요?” 해루는 찻잔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아침에 따라 놓은 건데, 한 모금 마셨던가. 내려오면 마시려고 했거든.”
해루는 웃으며 잔을 들었지만 차는 이미 차가웠다. 반짝이가 침대 기둥 위에서 물었다. “내려오는 일을 잊은 거야, 차를 잊은 거야?” 해루는 어느 쪽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위층에서 고칠 걸 하나 발견하면 아래층 일도 생각나. 그래서 내려오다가 다른 계단으로 올라가게 돼. 그러다 보면 방에 들어온 적이 있는지도 헷갈리고.”
노을은 의자에 남은 수건을 해루 쪽으로 밀었다. “그럼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기억하기 쉽겠네요. 점심 먹으러 갈 때 같이 내려가요.” 해루는 손님을 챙겨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이번에는 잠깐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해루의 장화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바로 일어나 닦으려 했지만 노을이 자기 수건이 아니라 바닥용 걸레를 찾아 가져왔다. 해루는 젖은 수건과 걸레가 어느 선반에 있는지 알려 주었다. 토리는 방을 외우려다가 색깔이 비슷한 문이 두 개여서 헷갈렸다고 말했다.
“파란 문은 손님 방, 초록 문은 물건 방이야. 다만 아침에는 둘 다 빛 때문에 파랗게 보여.” 해루가 설명했다. 노을은 방 이름을 붙이면 되겠다고 했다. 해루는 붙이려고 만든 나무판이 창고에 있다고 말하다가 웃음을 멈췄다. 하려고 준비한 일들이 실제로 끝낸 일보다 많았다.
토리가 창밖을 내다보며 해루는 이곳에서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해루는 곧바로 등대 불이 잘 켜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토리는 일이 잘되는 것 말고 그냥 좋아하는 것도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해루는 장화 끝을 보다가 새벽에 텃밭 위로 갈매기 그림자가 지나가는 순간을 골랐다.
“하늘을 보지 않아도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알아. 할머니가 날면 그림자가 천천히 가고, 어린 갈매기들은 양파 밭 위에서 빙빙 돌아.” 해루의 말이 조금 느려졌다. 노을은 오늘 아침에도 봤느냐고 물었다. 해루는 오늘은 창고 안에 있어서 못 봤다고 했다. 어제도 그랬다.
반짝이는 창문에 놓인 조그만 배 모형을 보았다. 돛 하나가 아직 달리지 않았다. 해루는 쉬는 날마다 만들었는데 폭풍 이후에는 만지지 못했다고 했다. 토리는 로코의 배보다 단추가 적다고 말하고는 배에는 단추가 아니라 돛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루가 소리 내어 웃자 아래층에서 할머니가 누가 왔느냐고 불렀다.
해루는 차가운 찻잔을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이번에는 상자까지 들지 않았다. 노을과 토리가 자기 가방을 방 안으로 옮기는 동안 기다렸다가 식당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었다. 좁은 계단에서는 해루의 우비가 벽을 스쳤다. 노을은 젖은 옷을 말릴 곳도 식사 뒤에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래층 식탁에는 크기가 다른 컵들이 놓여 있었다. 갈매기 할머니는 다친 날개 대신 부리와 멀쩡한 날개로 냅킨을 접고 있었다. 해루가 손을 뻗자 할머니는 네가 할 것은 옆 의자에 앉는 일이라고 말했다. 해루는 웃으며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위층 계단 쪽으로 자꾸 움직였다.
점심 식탁에서 갈매기 할머니는 반짝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이상한 것을 구경하는 눈이 아니라, 오래전에 들었던 소식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하늘의 별등에서 왔구나. 그 위에는 너 같은 작은 별들도 일을 배우며 산다고 들었다.”
반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내려온 길이 없어졌어요.”
“등대의 옛 기록을 보자꾸나. 하늘길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게다. 다만 오늘은 쉬어라. 먼바다를 건너온 발로 바로 탑을 오르면 계단만 미워하게 된다.”
식사가 끝날 무렵 위층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해루가 벌떡 일어났다.
“바람이에요. 제가 보고 올게요.”
새별과 로코가 뒤따라갔다. 계단 위의 큰 반사판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조임쇠 아래에는 임시로 감은 끈이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해루는 끈을 뒤로 숨기려다 멈췄다.
갈매기 할머니도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그건 언제부터 그랬니?”
“폭풍 다음 날부터요. 조임쇠가 하나 없어졌어요.”
“부품을 보내 달라는 편지에 왜 안 썼어?”
해루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두 난간도 망가졌고 지붕도 샜잖아요. 그것까지 못 고쳤다고 하면, 제가 할머니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아실까 봐요. 끈으로 묶으면 하루쯤은 버틸 줄 알았어요.”
갈매기 할머니는 반사판을 한참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어서 노을까지 어깨가 굳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먼저 한 말은 뜻밖이었다.
“내가 네게 맡긴 일이 너무 많았구나.”
해루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숨긴 건 잘못했어요.”
“그렇지. 그건 따로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네가 왜 숨기고 싶었는지도 내가 들어야겠어.”
로코가 무거운 반사판을 받치고, 새별이 계단 아래를 막았다. 해루는 자신이 임시로 손본 곳을 하나씩 말했다. 말할수록 귀가 내려갔지만, 목록이 길어져도 아무도 돌아서지 않았다.

노을과 토리는 아래층 탁자에 빈 종이를 펼쳤다. 고쳐야 할 일, 당장 위험한 곳,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그림으로 나누었다. 해루는 그 옆에 앉아 빠뜨린 나사를 하나 더 적었다.
“이것도 적으면 너무 많아 보이겠지?”
토리가 종이를 옆으로 한 장 더 붙였다.
“그럼 종이를 늘리면 돼. 작은 종이에 맞추느라 고장 난 곳을 빼면 찾기가 더 어려워.”
해루는 입을 다물고 두 번째 종이를 바라보았다.
두 장의 종이를 붙인 자리에 작은 틈이 생겼다. 노을이 풀을 가져오는 동안 해루는 연필을 들고 있다가 고장 목록 옆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갈매기 할머니가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전부 네 이름으로 채우려는 거니?”
“어디가 고장 났는지 제가 제일 잘 아니까요. 설명하는 것보다 제가 하면 빠를 때도 있고요.” 해루는 말한 뒤 연필을 내려놓았다.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아침부터 같은 계단을 몇 번씩 오르내렸다는 것을 떠올린 듯했다.
할머니는 다친 날개를 몸 가까이 붙이고 의자를 당겼다. “설명하는 일은 네가 맡아 주렴. 나는 부품 이름을 확인하고 편지를 쓰마. 날개를 쉬게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네가 전부 들고 가 버려서 내 일까지 놓치고 있었구나.”
해루는 창문 빗장 옆에 로코의 이름을 썼다가 선장에게 먼저 물었다. 로코는 배의 밧줄을 정리한 뒤라면 볼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이라고 쓰려던 자리에 ‘오후’라는 말이 들어갔다.
토리는 빈칸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아무도 없는데요.” 해루가 곧 입을 열려 하자 할머니가 종이를 가져갔다. “누가 할지 더 찾아봐야 한다는 칸이지. 해루라고 몰래 읽는 칸은 아니란다.” 해루는 웃다가 길게 하품했다.
로코가 창문 빗장을 살피는 동안 토리는 나무판 두 개에 방 이름을 쓰기로 했다. 해루는 글씨보다 문에 맞는 색을 먼저 골랐다. 노을은 붓을 들고 파란색을 너무 많이 묻혀 첫 글자 옆에 둥근 점을 만들었다. 토리가 지우려 하자 해루는 물방울 그림으로 써도 좋겠다고 했다.
“손님 방에는 물방울, 물건 방에는 상자. 색이 비슷하게 보여도 그림으로 찾겠네.” 노을이 말했다. 해루는 자기가 준비한 판이 오늘 비로소 문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혼자 했다면 글씨가 더 반듯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혼자 하려고 선반에 두었던 시간 동안에는 누구도 그 판을 볼 수 없었다.

부품 이름을 확인하던 할머니가 해루를 불렀다. 빠진 조임쇠의 길이는 손가락으로 짐작해서는 안 됐다. 해루는 같은 반사판의 다른 조임쇠를 새별이 재어 준 수치와 대조했다. 노을과 토리는 그 옆에서 자를 종이에 대 보았다.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도 실제 크기를 알 필요가 있었다.
해루는 편지 마지막에 급하다는 말을 두 번 쓰고 싶어 했다. 할머니는 급한 이유를 적자고 말했다. 반사판을 안전하게 내려놓았으며, 다시 설치하려면 그 부품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로코는 항구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자기 배에 있는 것을 따로 확인해 주었다.
불씨는 해루의 작은 배 모형을 식탁 끝으로 가져와도 되느냐고 물었다. 해루는 고칠 일이 남았는데 모형을 볼 시간이 있겠느냐고 했다. 불씨는 자기 수리공 선생님은 쇠가 식을 때 꼭 다른 곳을 본다고 답했다. 아직 움직일 수 없는 것을 계속 쳐다본다고 빨리 식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루는 잠깐 모형을 들었다. 돛을 다는 기둥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지만 당장 고치지 않았다. 토리는 여행이 끝나고 다시 오면 돛이 달린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해루는 그때까지 등대를 전부 고치겠다는 대답 대신, 돛 한 장 정도는 달아 두고 싶다고 말했다.
창밖의 하늘이 붉어졌을 때 해루는 문득 아침 이후 처음으로 바다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은 아직 남아 있었고 목록도 짧아지지 않았다. 다만 종이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고, 손님 방에는 물방울 그림이 매달려 있었다. 해루는 오늘 한 일을 말할 때 ‘내가’ 대신 ‘우리가’라는 말을 두 번이나 썼다.
그날 오후, 등대 불은 끝내 켜지지 않았다. 대신 무거운 반사판을 안전하게 내렸고, 모두가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다. 해루의 젓가락은 식사 중간에 두 번 멈췄다.
세 번째로 눈이 감기자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밤 당번은 네가 아니다. 그릇은 두고 올라가렴.”
해루는 처음으로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