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가장 눈에 띄는 배에는 빨간 돛과 커다란 돛대가 있었다. 검은 해적 모자를 쓴 여우가 뱃머리 위에서 상자 뚜껑을 열고 있었다. 한쪽 눈에는 안대가 걸려 있었고, 긴 외투의 단추는 제각기 모양이 달랐다.
“내 이름은 로코! 이 배로 안 가 본 바다가 없지. 어제는 절벽 밑에서 아주 특별한 물건을 건져 올렸고!”
“서쪽 얼음바다는 아직 못 갔다고 지난번에 그러셨잖아요.”
생선 상인이 지나가며 말했다.
로코가 헛기침했다.
“그쪽은 일부러 남겨 둔 거요. 갈 곳이 하나쯤 있어야 아침에 일어나는 재미가 있지.”
배 옆에는 밧줄을 감아 둔 기둥 세 개가 있었다. 줄마다 다른 색 천이 달려 있었지만 모두 바닷물에 바래 있었다. 토리는 가장 큰 매듭을 보고 자기 가방 끈과 비교했다. 가방에서 실이 끊어지면 연필을 잃어버릴 뿐이지만 저 줄이 풀리면 배 전체가 움직일 것 같았다.
로코는 아이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뱃머리에서 내려와 난간 안쪽에 기대 섰다. “매듭 구경도 공짜다. 다만 풀어 보는 체험은 없지.” 토리는 풀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손을 뒤로 돌렸다. 노을은 선장의 단추가 왜 전부 다르냐고 물었다.
“하나를 잃을 때마다 그 항구에서 구했거든. 이 파란 건 비 오는 날, 저 납작한 건 장터가 쉬는 날 얻었지.” 로코는 작은 나무 단추를 짚었다. “이건 내가 깎았고. 가게가 없어도 외투는 잠가야 했으니까.” 노을은 멋으로 다른 단추를 달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집순이는 배와 부두 사이의 틈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바다에서는 마당이 계속 움직이네. 솔로 쓸어 놓은 것도 다시 굴러가겠어.” 로코가 웃으며 갑판 아래 작은 홈을 가리켰다. 빗물과 튄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자리였다. 집순이는 그 홈이 막히면 골치 아프겠다고 말했다.
“배를 아는 친구로군.” 로코가 말하자 집순이는 배는 모르지만 젖는 마당은 안다고 답했다. 반짝이는 빨간 돛 아래를 올려다보았다. 천을 통과한 햇빛이 어깨에 붉게 내려앉았다. 노을의 목수건을 통과할 때와 비슷한 빛이었지만 훨씬 넓었다.
노을은 배를 타면 어느 쪽이 길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육지에는 돌담과 나무라도 있었다. 로코는 하늘과 해안, 기록과 물살을 함께 본다고 했다. 하나만 보고 간다고 큰소리쳤다가 멀쩡한 항구 앞을 한 바퀴 돈 적도 있었다. 토리는 그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어졌지만 로코는 오늘은 보물이 먼저라며 상자로 손을 뻗었다.
상자 뚜껑에는 바닷바람에 생긴 흠집이 많았다. 로코가 손바닥으로 한번 쓸자 소금 가루가 떨어졌다. 노을은 상자 속에 반짝이는 것만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뚜껑이 열리는 소리는 오래 쓴 찬장의 소리와 비슷했다. 토리는 안에 든 물건마다 어디서 왔는지 이름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토리는 이미 상자 앞에 붙어 있었다. 안에는 굽은 쇠못, 색유리병, 오래된 동전 몇 개와 둥근 놋쇠판이 들어 있었다. 놋쇠판 가장자리에 여섯 개의 홈이 있었다.

새별이 앞으로 나왔다.
“그건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옛 아치 밑 얕은 물에서. 건지는 데 밧줄 두 개, 장갑 한 켤레가 들었소. 장갑은 오른손 것만 잃었는데, 왼손 것만 찾는 손님이 없더군.”
새별은 놋쇠판을 집지 않고 몸을 숙여 문양부터 확인했다.
“빛길의 두 번째 문에 달려 있던 덮개예요. 아치 관리실 물건입니다.”
로코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관리실에서 버린 줄 알았소. 물속에 오래 굴러다니던데.”
“어젯밤 바람에 관리실 문이 부서졌어요. 떨어져 나간 물건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 있다는 건 알려 드리겠소. 그렇다고 내가 고생해서 건진 물건을 그냥—”
노을은 실망했다. 조금 전까지 보물을 보여 주던 선장이 갑자기 상자를 닫으려 하자, 멋진 모자도 덜 멋져 보였다.
토리는 새별의 망토를 살짝 잡아당겼다.
“찾아 줬으니까 보상은 받을 수 있지 않아요? 지도 잃어버렸을 때 누가 찾아 줬으면 나도 고마웠을 텐데.”
노을이 토리를 보았다. 토리는 로코의 편을 든 것처럼 보일까 봐 급히 덧붙였다.
“그렇다고 안 돌려줘도 된다는 건 아니고.”
로코는 닫으려던 뚜껑을 손등으로 받쳤다. 오래된 상자 경첩이 끼익 울었다. 노을은 그 안에서 금화가 반짝일 때보다 지금 선장의 대답이 더 궁금했다.
“물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필요 없어서 버린 것처럼 보였지. 줄이 바위에 걸려서 두 번이나 돌아 들어갔어. 그런데 내놓으라는 말부터 들으니, 그때 젖은 옷이며 쓸린 손이 다 별것 아닌 것 같더구나.”
“고생한 이야기를 먼저 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노을이 물었다. “나는 선장님이 문을 고치는 것보다 보물을 가지는 게 더 좋은 줄 알았어요. 상자를 닫으려고 하셔서요.”
로코는 상자에서 손을 뗐다.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이걸 뱃머리에 달면 얼마나 근사하겠어. 하지만 저 문이 이 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지금 알았고.”
토리는 판의 여섯 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되 만지지는 않았다. “배에 달면 선장님만 볼 수 있지만, 제자리에 달면 항구 사람들이 다 볼 텐데요. 누가 찾아 줬는지도 기록하면 되잖아요.”
새별은 로코의 해진 장갑과 노을의 굳은 표정을 차례로 보았다. 돌려받아야 할 물건 이야기도, 물속에 들어간 사람의 수고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새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두 가지를 나눠서 이야기하자.”
새별은 관리실에서 물건을 찾고 있다는 공고를 가져왔다. 습득 신고를 하면 수고비와 잃어버린 도구 값을 신청할 수 있었다. 로코는 공고를 다 읽은 다음 안대를 이마로 올렸다. 눈은 둘 다 멀쩡했다.
노을이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눈은 안 다치셨어요?”
“햇빛 반사를 덜 보려고 쓰는 거다. 가끔은 멋으로도 쓰고.”
로코는 상자에서 놋쇠판을 꺼내 새별에게 건넸다.

“찾은 곳도 보여 주겠소. 대신 신청서에 장갑 한 켤레라고 쓰지 말고 한 짝이라고 써 줘요. 안 잃은 것까지 받으면 다음에 잃어버렸을 때 설명이 복잡해지니까.”
새별은 처음으로 웃었다.
로코는 놋쇠판을 낡은 돛 조각으로 감쌌다. 이제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고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는 모서리 하나가 조금 휘었다며 새별에게 먼저 보여 주었다. 바위에서 건질 때 생긴 것인지 원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새별은 그 말까지 수첩에 적었다.
토리는 다른 보물들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로코는 색유리병 하나를 들었다. 목 부분이 깨져 병으로 쓰기는 어려웠지만, 입구를 갈아 작은 솔을 꽂아 두고 있었다. 굽은 쇠못은 자기가 배를 수리하다 떨어뜨린 것이었다. 노을은 자기 물건을 찾아서도 보물이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다시 찾았으면 그날은 보물이지. 못 하나가 없어서 나무판을 못 붙이면 그때는 금화보다 아쉽다.” 로코는 상자를 닫고 잠갔다. 노을은 이제 상자를 닫는 모습이 아까와 다르게 보였다. 닫는 행동만으로 그 안을 혼자 가지려는지 일을 마치려는지 알 수는 없었다.
관리실로 가는 골목에는 배를 고치는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문 앞마다 다른 냄새가 났다. 젖은 밧줄 냄새, 나무를 깎은 냄새, 생선 수프 냄새가 한 걸음마다 바뀌었다. 로코는 모자를 들어 가게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대부분 로코가 무슨 보물을 들고 가는지 먼저 물었다.
“내 보물이었다가 제집을 찾은 물건이오!” 로코가 대답했다. 생선 상인이 아까처럼 한마디를 보태려다가 놋쇠판의 무늬를 보고 말을 멈췄다. 그는 아치 문을 고치면 항구 바깥에 묶인 배도 들어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새별은 문과 길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답했다.
로코는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포장 천 한쪽을 들었다. 해가 비친 놋쇠판에 자신의 모자가 흐리게 비쳤다. “뱃머리에 달아 놓으면 내 얼굴만 매일 봤겠군. 얼굴은 거울에도 있는데.” 노을이 웃자 로코는 그래도 근사했을 거라는 말은 포기하지 않았다.
절벽 쪽으로 다가갈수록 바닷바람이 좁은 골목을 밀고 들어왔다. 은솔은 집순이의 걸음에 맞춰 자리를 바꾸었다. 로코는 길가의 느슨한 밧줄을 감아 기둥 위에 올려 두었다. 말은 크고 걸음은 성큼성큼이었지만, 항구에서 발에 걸릴 것들은 지나치지 않았다. 노을은 선장의 외투 뒤에 따라붙어 걷는 일이 아까보다 조금 좋아졌다.
아치 아래 관리실은 항구에서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단, 가운데 다리가 무너져 있어 먼 쪽 문은 접근할 수 없었다. 가까운 쪽 방에는 바닷길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유리 그릇이 있었다. 덮개가 없어서 바닷물이 튄 자국이 가득했다.
로코는 놋쇠판을 올려놓으려다 손을 멈췄다.
“이 방향이었나?”
집순이가 바닥의 마른 자국을 가리켰다.
“반대야. 여기가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어.”
놋쇠판을 돌리자 홈이 정확히 맞았다. 하지만 고정쇠는 염분에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로코는 공구 주머니에서 짧은 손잡이를 꺼냈다. 새별이 먼저 고정쇠의 밑을 살폈다. 힘을 더 주면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얇은 유리 가장자리까지 함께 눌릴 것 같았다. 로코는 손잡이를 돌리지 않고 내려놓았다. 아이들은 두 어른이 말없이 물건을 보는 시간을 기다렸다.
“배에서는 이 정도면 팔힘으로 버텨 보는데, 여기서는 배처럼 하면 안 되겠소.” 로코가 말했다. 토리는 왜 다르냐고 물었다. 로코는 자신의 배라면 나무가 어느 쪽으로 휘는지 아는데 이 시설은 처음 본다고 했다. 커다란 손이 있다고 처음 보는 물건의 속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은솔은 물기를 닦을 천을 가져왔다. 고정쇠 주위가 조금씩 드러나자 하얀 소금 덩어리가 보였다. 집순이가 솔 끝으로 겉에 붙은 것을 걷어 냈다. 얇은 가루는 떨어졌지만 안쪽의 굳은 부분은 남았다. 토리는 모래처럼 쓸면 되는 줄 알았다며 솔을 바라보았다.
새별은 관리실 서랍에서 낡은 수리 기록을 찾았다. 종이는 습기를 먹어 서로 붙어 있었다. 두 장을 한꺼번에 잡아당기면 글씨가 떨어질 것 같아 은솔이 마른 천 위에 천천히 펼쳤다. 노을은 표지의 그림을 보고 로코에게 어느 도구인지 물었다. 로코는 작은 화로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답했다.
“열을 쓰는 방법이 적혀 있군. 하지만 시설에 맞는 온도와 도구를 확인해야겠소.” 새별은 필요한 부분을 읽고 옆 가게에서 일하는 장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노을은 문을 고치는 일이 쇠판 하나를 갖다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토리는 판이 있어야 그다음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게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로코는 작업대에 놓인 놋쇠판이 흔들리지 않도록 나무 받침을 옮겼다. 그 밑에서 마른 조개껍데기가 굴러 나왔다. 집순이가 진짜 조개라고 확인해 주자 노을이 웃었다. 이 여행에서는 별무늬 뚜껑이 굴껍데기처럼 보이기도 했고, 보물이 문짝의 일부이기도 했다.
반짝이는 두 친구의 웃음을 듣다가 유리 그릇 아래를 보았다. 어두운 돌틈에서 바다 쪽 빛과는 다른 금빛이 잠깐 비쳤다. 별은 몸을 낮추려다 노을의 어깨 높이에서 멈췄다. 첫 번째 관리실에서 안개가 가까워졌던 일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먼저 손끝으로 틈을 가리켰다.
반짝이가 그릇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도 있어.”
작은 별유리 조각이 돌 틈에 박혀 있었다. 은솔이 집게로 꺼내 깡통에 넣었다. 처음 주운 조각과 모서리가 이어졌다. 노을은 두 조각이 맞물리는 모양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로코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저 유리, 내가 바다에서 봤소. 깨지는 순간을.”
새별이 수첩을 폈다.
“어젯밤이었나요?”
“그 전날 밤, 폭풍이 가장 셀 때였소. 하늘에서 노란 선이 한쪽으로 몰리더니 흰 불꽃이 튀었지. 번개라고 생각했는데 소리가 늦게 났어. 유리잔 백 개를 함께 깨뜨리는 것 같았소.”
반짝이는 노을의 목수건 뒤로 조금 숨었다.
노을은 목수건을 잡아당기지 않고 어깨를 가만히 두었다. 반짝이의 빛이 붉은 천을 통과해 손등에 작은 주황색 점을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유리 조각을 구경하던 별의 모서리가 안쪽으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소리 얘기를 들으니까 그날 밤이 생각나?” 노을이 낮게 물었다. 반짝이는 대답하는 대신 천 끝을 붙잡았다. 노을은 더 묻지 않고 깡통 뚜껑을 닫아 달라고 은솔에게 손짓했다.
새별은 수첩의 문장을 로코에게 다시 읽어 주었다. “노란 선이 먼저 모였고, 흰빛이 난 뒤에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순서가 맞나요? 어느 쪽 하늘인지는 여기서 가리켜 주실 수 있겠어요?”
로코는 곧장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배가 돌아가고 있었소. 그때 뱃머리 왼쪽이라는 건 기억하지만 지금 여기서 왼쪽을 짚으면 틀릴 거요. 배에 항해 기록이 있으니 같이 보지.”
토리는 자기 지도에 하늘을 향한 화살표를 그리려다 연필을 뗐다. 방향을 모르는 화살표는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다음 사람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대신 지도 가장자리에 ‘선장 기록 확인’이라고 적었다.
노을은 목수건 속에 있는 반짝이에게 속삭였다. “지금 말하기 어려우면 쉬어도 돼. 나는 선장님이 보여 주는 기록을 볼게. 네가 보고 싶어지면 그때 같이 보자.” 작은 빛이 천 밖으로 조금 나왔다.
로코는 아치 너머 하늘을 보았다.
“자, 그 물건이 길을 고치는 데 필요하다면 내가 실어 주겠소. 배삯 이야기는 관리소하고 할 테니 너희가 동전 꺼낼 생각은 말고.”
그때 창밖의 작은 굴뚝에서 연기 한 줄기가 올라왔다. 곧바로 재채기 소리도 들렸다.
“불을 더 크게 하랬지, 재채기를 더 크게 하라는 게 아니었는데!”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가 항구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