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솔은 바닷길과 눈길을 오가며 우편을 나르는 은회색 여우였다. 노을이 어릴 때부터 편지를 가져다주던 이웃이었고, 귀마개와 하늘색 스웨터에는 바람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날 우편소 탁자에는 세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북쪽 별지기에게 줄 지도, 빵집에 돌려줄 바구니, 절벽 마을 진료소에 보낼 약이었다.
지도 꾸러미의 끈은 파랑, 약 꾸러미의 끈은 하양이었다. 빈 바구니에는 끈 대신 빵집 이름이 적힌 천이 묶여 있었다. 은솔은 물건을 잘못 건네지 않으려고 표시를 달았는데, 오늘은 표시를 읽기도 전에 누가 언제 기다린다고 했는지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편소 안에는 바깥보다 바람이 적었다. 그래도 문을 열 때마다 탁자 위 종이가 조금씩 밀렸다. 노을은 가까운 문진을 종이 위에 올렸다. 문진 밑에서 반쯤 가려진 편지에는 은솔에게 고맙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것도 배달할 편지야?” 노을이 물었다. 은솔은 가방 끈을 고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작년 겨울에 받은 거야. 눈 때문에 못 만난 가족의 편지를 전했거든. 그분들이 내게 다시 편지를 보내 주셨어.”
토리는 벽에 걸린 작은 그림들을 보았다. 마을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삐뚤빼뚤한 은색 여우가 여러 장 있었다. 어떤 그림에서는 은솔의 가방이 몸보다 컸고, 어떤 그림에서는 꼬리가 길을 감고 돌 만큼 길었다. 은솔은 그림마다 누가 준 것인지 기억했다.
“가방이 이렇게 크면 오늘 짐도 다 들어가겠네요.” 토리가 가장 큰 그림을 가리켰다. 은솔은 웃으며 실제 가방을 들어 보였다. “그림 속 가방은 편하겠지. 하지만 그림 속 나는 점심도 안 먹고 종일 걷더구나. 그건 조금 부럽지 않아.”

노을은 은솔이 평소 편지를 건네고 바로 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음 집으로 가면 일이 끝나는 줄 알았지만, 그 집 다음에도 또 다른 집이 있었다. 돌아오는 은솔을 본 적은 많지 않았다. 노을이 저녁을 먹거나 잠든 뒤에야 이 우편소에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반짝이는 지도 꾸러미 위로 몸을 기울였다. 파란 끈 아래에 별 모양 도장이 보였다. 은솔은 북쪽 길을 맡은 별지기에게 주는 새 지도라고 설명했다. 오래된 길이 실제와 달라진 곳을 표시했다고 했다. 토리는 자기가 어제 고친 집 위치를 생각하며 지도도 배달할 소식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문밖에서 수레 바퀴가 멈추었다. 토리의 아빠가 빈 수레를 세우고 들어왔다. 은솔은 도움을 부탁하기보다 자기가 어떻게 다녀오려는지 먼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을 마치면 시간이 줄어들 것처럼 손가락으로 탁자의 세 꾸러미를 빠르게 짚었다.
“아침 종 전에 바구니를 드리고, 낮 종 전에 약을 싣고, 물 빠지기 전에 북쪽 길에 도착하면 돼. 너희를 데리고 가는 건 그 사이에 넣을 수 있어.”
은솔이 어깨끈을 당겼다. 꾸러미 하나가 떨어져 토리의 모자를 덮쳤다.
“그 사이는 어디 있어요?” 토리가 모자를 주우며 물었다. “지도에서 재 봤는데, 빵집에 갔다 북쪽으로 가면 썰물 때를 놓칠 것 같아요.”
“조금 빨리 걸으면 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노을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자기 가방에 넣었다. 은솔의 가방은 이미 매듭을 묶기도 어려울 만큼 꽉 차 있었다.
“다 약속한 거예요?”
“그렇지. 빵집에서는 바구니가 꼭 필요하다고 했고, 진료소에서는 약이 늦으면 안 된다고 했고……. 다 급한 일이더구나.”
엄마가 우편소 문을 잡고 기다렸다. 은솔은 괜찮다는 말을 하려다 지도 위를 다시 보았다. 손가락으로 세 길을 따라가도 길은 짧아지지 않았다.
토리는 탁자에 빵 부스러기 세 개를 놓았다. 하나는 빵집, 하나는 진료소, 마지막은 북쪽 길이었다. 은솔의 손가락이 빵집에 닿자 토리는 북쪽 길의 부스러기를 조금 더 멀리 옮겼다.
“거리가 늘어난 건 아니에요. 이쪽을 돌아오면 물 빠지는 시간이 줄어드니까요. 지도에는 시간이 안 그려져 있어서 자꾸 빠져요.”
은솔은 웃으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창밖의 우편 깃발이 두 번 접혔다 펴졌다. “매번 이 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왜 종이 위에서도 못 걷겠니.”
“짐이 많아서요?” 노을이 물었다.
“짐도 많지. 그런데 누가 부탁할 때마다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내가 좋았나 봐. 이웃들이 나를 보면 안심하거든. 오늘은 어렵다고 말하면 그 얼굴이 달라질까 봐 싫었어.”
노을은 가방 위로 삐져나온 약 꾸러미를 보았다. 은솔이 평소처럼 씩씩하게 어깨끈을 당길 때마다 상자가 눌렸다. 빨리 출발하면 걱정도 작아질 줄 알았는데, 아직 한 걸음도 떼지 않았는데 더 커지고 있었다.
엄마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부탁을 나누면 기다리는 분들도 다른 준비를 할 수 있어. 어떤 걸 늦출지 혼자 정하기 전에,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지부터 생각해 보자.”

반짝이가 탁자 위로 내려왔다.
“하나를 먼저 고르면 다른 친구는 서운하겠지? 나도 그런 건 잘 못 골라. 그래서 가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그러면 나중에는 더 말하기 어려워져.”
은솔은 반짝이를 잠시 보더니 가방을 내려놓았다.
“벌써 늦었을까 봐, 늦겠다는 말을 못 했네. 바구니부터 부탁할 사람을 찾아야겠다.”
끼룩이 날개를 들었다. “빈 바구니라면 제가 끌 수 있어요. 하지만 빵집까지 걸어가야 해요. 날 수 있다고 무거운 것도 날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토리의 아빠가 바구니를 수레에 실었다. 끼룩은 길 안내를 맡았다. 약은 은솔이 붉은절벽 진료소까지 직접 가져가기로 했다. 북쪽 별지기를 먼저 만난 뒤 같은 길로 이어 갈 수 있었다. 은솔은 별지기에게 편지를 써서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는다고 알렸다.
일을 나누고 나니 가방 입구가 닫혔다. 은솔은 빈 공간에 물통을 하나 더 넣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의 가방을 살필 차례였다. 노을의 가방에서는 작은 담요가 제일 먼저 나왔다. 두 번 접어도 가방 입구보다 넓었다. 엄마가 다른 담요를 가져오겠다고 하자 노을은 이 담요가 좋다고 말했다. 오래 써서 모서리가 부드러워진 담요였다.
은솔은 노을의 가방을 들어 보라고 했다. 노을은 어깨에 걸고 우편소 문까지 걸었다. 몇 걸음은 괜찮았지만 몸을 돌릴 때 가방이 허리 아래를 툭 쳤다. 반짝이가 피하려고 높이 떠올랐다.
“밤에 덮을 것이 필요해서 챙긴 거니, 집에 있는 느낌이 필요해서 챙긴 거니?” 엄마가 물었다. 노을은 둘 다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담요를 빼앗지 않고 무릎에 펼쳤다. 노을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만지다가 집에서 쓰던 작은 수건도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떠올렸다.
담요는 집에 두고 작은 수건을 가져가기로 했다. 노을이 직접 골랐다. 토리는 가방에 색연필을 전부 넣으려다가 은솔에게 이미 빌린 연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세 자루만 남겼다. 색깔이 부족하면 글씨로 적겠다고 했지만, 파란색을 빼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반짝이는 자신의 작은 천을 빈 주머니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노을은 자기 물통 옆을 가리켰다가 뚜껑이 열리면 젖겠다는 생각에 다른 칸을 골랐다. 함께 챙기는 짐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중요한 자리는 달랐다.

끼룩이 수레 손잡이 위에서 아이들을 불렀다. “다녀오면 등대가 진짜 얼마나 큰지 말해 줘. 멀리서는 내가 날개를 펴면 가려질 만큼 작아 보이거든.” 토리는 높이를 재 올 도구가 없다고 했다. 끼룩은 숫자가 아니어도 된다고, 토리 몇 명을 쌓은 만큼인지 말해 달라고 했다.
토리는 자기 키를 갑자기 의식한 듯 허리를 폈다. 노을이 모자 높이는 빼야 한다고 하자 끼룩이 크게 웃었다. 은솔은 그 웃음을 들으며 가방 끈을 한 칸 느슨하게 했다. 출발을 늦춘 것은 맞지만, 아까처럼 짐과 시간을 한꺼번에 놓칠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는 빈자리가 생겼다. 은솔은 마지막으로 남은 편지의 주소를 확인했다. 그다음에는 세 친구의 얼굴을 한 명씩 보았다. 지도와 약을 받는 사람뿐 아니라, 이제 함께 걸을 사람에게도 오늘의 약속을 알려 주어야 했다.
“너희 부모님께는 내가 다음 숙소에 도착해서 연락하마. 돌아오고 싶어지면 그때도 말해도 돼. 이미 출발했다고 꼭 끝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노을은 엄마를 안았다. 토리는 아빠와 이마를 맞댔다. 엄마는 반짝이에게 작은 손수건을 건넸다. 그것은 노을의 빨간 목수건보다 작아서 별의 몸에 잘 맞았다.

반짝이는 손수건의 네 귀퉁이를 차례로 잡아 보았다. 자기 몸에는 끝이 다섯 개여서 하나가 자꾸 밖으로 나왔다. 노을이 웃음을 참자 반짝이가 먼저 말했다. “이건 내가 잘못 접어서 그런 거지? 하늘에서는 나한테 맞는 것만 썼거든.”
“하나는 밖에 둬도 돼.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기 좋잖아.” 엄마는 매듭을 꽉 묶지 않았다. “불편하면 은솔에게 풀어 달라고 하고.”
토리는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지도를 보여 주려다 접었다. 종이에 보태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돌아올 때 보여 주겠다고 하자, 아빠는 돌아오면 식탁에 지도를 펼쳐 함께 보자고 했다.
우편소 종이 가볍게 울렸다. 나갈 시간이었지만 노을의 발은 문턱에 잠깐 붙었다. 아침마다 혼자 빵집에 다녔을 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점심때 집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엄마, 도시락에 무슨 빵 넣었어?” 노을은 이미 냄새로 알고 있으면서 물었다.
“네가 먼저 꺼낼 빵하고, 아껴 두었다가 친구한테 줄 빵.”
노을은 가방을 두 손으로 고쳐 멨다. 갑자기 가방이 무거워진 것 같았지만, 아까보다 들기 어려운 무게는 아니었다. 은솔은 서두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문밖에서 기다렸다.
마을의 마지막 돌담을 지나자 바닷바람이 옆구리로 들어왔다. 노을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지붕 몇 개가 보였지만 어느 것이 자기 집인지 금방 고르지 못했다. 매일 창문에서 내려다보던 길을 바깥쪽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토리는 큰 소리로 우편소에서 여기까지 걸음을 세려다가 그만두었다. 노을이 말을 걸 때마다 숫자를 잊었다. 은솔은 정확한 걸음 수보다 길에서 무엇을 만났는지 적어 보라고 했다. 큰 바위, 둘로 갈라진 소나무, 물때가 남은 돌담 같은 것들이었다.
“은솔은 편지를 처음 나를 때 길을 다 알았어?” 노을이 묻자 은솔은 아주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첫 배달 때는 같은 집에 두 번 가서 두 번째 인사를 했다고 했다. 토리는 그 집의 문을 지도에 어떻게 그렸느냐고 물었다. 은솔은 지도를 안 가져간 것이 첫 실수였다고 답했다.
반짝이가 은솔의 가방 위로 날아와 손잡이에 잠깐 앉았다. “처음에 못 했는데도 계속 하고 싶었어?” 은솔은 앞의 오르막을 보며 대답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봉투를 여는 얼굴이 좋았어.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서 모르는 길을 하나씩 배웠지.”
길이 좁아져 토리가 먼저 걸었다. 노을은 뒤에서 친구의 가방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평소에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던 사이였는데, 오늘은 한 줄로 걷는 시간이 길었다. 말을 걸려면 이름을 한 번 불러야 했고, 대답을 들으려면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토리는 납작한 바위를 지나며 이번에는 길을 잘못 그리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을은 벌써부터 그런 약속을 하면 힘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토리는 잠깐 생각하다가 틀린 데를 찾으면 종이를 더 붙이겠다고 고쳤다. 가방 옆주머니에는 빵집에서 받은 빈 종이가 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두 친구의 말이 오가는 사이에서 바다를 보았다. 아침 햇빛이 작은 물결마다 부서져 별처럼 보였다. 노을이 저것도 친구냐고 장난스럽게 묻자 반짝이는 이번에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 했다. 햇빛이 물에서 흔들리는 것과 살아 있는 별은 가까이서 보면 다르다고 했다.
길은 곧 해안 쪽으로 낮아졌다. 은솔은 넓은 돌이 놓인 자리에서 잠깐 가방 끈을 고쳐 멨다. 노을은 바다가 보이자 뒤로 돌아 마을 쪽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높은 언덕에 우편소 지붕이 작게 남아 있었다.
길을 떠난 뒤, 토리는 지도에 우편소를 그렸다. 커다란 그림은 종이 가장자리로 옮겼다. 은솔은 그 모습을 보고 웃다가 발을 멈췄다.
해안 아래쪽 바위에 금빛 조각이 끼어 있었다. 반짝이가 다가가자 조각이 짧게 울렸다. 노을은 반짝이와 같은 친구일까 봐 먼저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었다.
반짝이는 이지러진 자기 끝과 조각을 나란히 보았다.
“이건 살아 있는 별이 아니야. 우리가 돌보던 등불의 겉면 같은데……. 왜 여기까지 떨어졌지?”
은솔은 집게로 조각을 건져 작은 주석통에 넣었다. 통의 뚜껑을 닫자 빛이 잦아들었다.

“등대 할머니께 보여드리자. 손이 다치지 않게 이 통에 보관하면 되겠구나.”
조각이 있던 자리를 검은 안개가 스쳤다. 해초가 잠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바람은 반대쪽으로 불고 있었다.
노을이 은솔의 손을 잡았다. 은솔도 안개를 보았다. 일행은 언덕 쪽의 마른 길로 물러났다.
그때 발밑의 분홍 소라에서 작은 목소리가 났다.
“뒤로 한 걸음만 더 오면 내 현관이야. 문 앞에 꼬리를 내려놓기 전에 아래 좀 봐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