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린은 꽃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전에, 사진에서 치우는 법부터 배웠다.
시든 잎은 뒤로 돌린다. 빈 화분은 큰 화분 뒤에 놓는다. 그래도 안 되면 화면을 좁힌다. 행사장 꽃장식을 철거하며 배운 기술이었다. 살아 있는 꽃을 맡아본 적은 없었지만, 아침에 걸려온 전화에는 오래 다뤄봤다고 대답했다.
11월 6일, 금요일. 오늘 일은 온실의 식물을 세고 사진을 찍는 것. 서린은 혼자서 오후 다섯 시면 끝날 거라고 계산했다. 그러면 여섯 시부터 역 앞 호텔의 꽃장식을 도울 수 있었다. 그쪽 일당이 더 컸다.
온실 문에는 종이 두 장이 겹쳐 붙어 있었다. 위에는 ‘정리 예정’, 아래에는 바랜 글씨로 ‘닫힌 문을 두드려 주세요’.
서린은 두드리는 대신 손잡이를 당겼다.
“그 문, 밀어야 열려요.”
안쪽에서 사다리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서린은 당기던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문이 걸렸나 봐요, 하고 웃었다. 남자는 웃어주지 않았다. 사다리 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어깨를 적셨다.
“윤태오예요. 아침에 통화했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장부를 찾는 중인데, 식물 목록도 없어서요.”
그가 내민 종이에는 화분 크기, 수량, 상태를 적는 빈칸이 있었다. 마지막 줄의 ‘상태’만 유난히 넓었다. 서린은 위쪽에 이름을 적고, 마지막 획을 무심코 잎처럼 올렸다. 어릴 때부터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온실 안은 바깥보다 추웠다. 유리 지붕 한쪽에 비닐이 덧대어져 있었고, 난방기 플러그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 중앙 작업대에 놓인 화분 일곱 개에서는 희미한 김이 올라왔다. 첫 화분에는 접힌 은박지 같은 봉오리가 매달려 있었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그것도 목록에 없어요. 할머니는 마지막 것들이라고만 하셨어요.”
서린이 이름표를 돌리자 글씨가 보였다.
11월 6일 여섯 시까지 내가 직접 열쇠를 돌려줄게.
꽃 이름치고는 길었다.
“손님 메모 같은 거겠죠.” 태오는 물받이 양동이를 바꾸며 말했다. “오래된 화분엔 가끔 저런 게 있어요.”
서린은 작업대의 낡은 공책을 서랍으로 밀어 넣었다. 사진에 잡히는 것이 적을수록 좋았다. 이름표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봉오리가 딱, 소리를 냈다. 추위에 유리가 갈라지는 것 같은 작은 소리였다.
오후 네 시 사십 분, 화분은 스물세 개째였다. 살려둘 것과 버릴 것을 가르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마른 줄기 안이 초록이면 살아 있다고 검색 결과는 말했다. 서린은 줄기를 조금 긁어보고, 긁은 자리가 미안해져서 젖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때 문밖에서 세 번, 간격이 고른 두드림이 들렸다.
들어온 여자는 천 가방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가방 위로 보온통 뚜껑이 보였다.
“문해주라고 해요. 전에 정혜 선생님이 여기 계실 때……”
그녀는 태오의 검은 상복 바지를 보고 말을 멈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에서 입었던 옷이라고, 태오가 아침에 설명했었다.
“그러셨구나.”
해주는 가방을 내려놓지 못했다. 잠깐 기다린 뒤 태오가 의자를 가져왔다. 그녀는 앉지 않고 작업대 첫 화분 앞에 섰다.
“아직 안 폈네요.”
“오늘 열쇠 돌려주시기로 한 분이에요?” 서린이 물었다.
여자는 이름표를 한번 보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바닥 위로 은색 열쇠가 나왔다. 고리에는 작은 고무 딸기가 달려 있었다. 꼭지 두 개가 떨어져 나간 딸기였다.
“딸 집 열쇠예요. 반찬만 놓고 오려고 했는데, 그날은 일이 좀……”
말이 끊겼다. 손가락이 고무 딸기의 맨질맨질한 머리를 문질렀다.
“냉장고를 정리했어요. 버리지 말라는 것도 버리고. 서랍도 열었고요. 도와준다고 생각했는데.”
해주는 가방 속 보온통을 내려다봤다.
“지난주 목요일에 돌려달라고 했어요. 시간을 좀 달라다가 오늘, 육일까지 직접 넣고 오겠다고 했죠. 그날 선생님한테도 이 화분을 맡겼고요. 여섯 시 지나면 딸이 야간 근무를 가요.”
“그럼 넣으시면 되잖아요.”
쉽게 말한 뒤에야 서린은 여자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보았다.
“아까 집 앞까지 갔는데, 불이 켜져 있었어요. 있는데도 내려오지 말라고 하니까. 이걸 돌려주면 다음엔 어떻게 들어가나 싶어서요.”
서린은 화분과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다섯 시 십 분. 호텔 담당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여섯 시 맞춰 오시죠? 늦으시면 지금 대체 인력 잡아야 합니다.’
“제가 대신 넣어드릴까요? 가는 길이면.”
해주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열쇠가 서린의 손으로 넘어왔다.
봉오리에서 다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은빛 가장자리에 갈색 선이 생겼다. 태오도 보았는지 양동이를 내려놓았다.
태오가 작업대 위를 둘러보자 서린은 서랍을 가리켰다. 그가 공책을 꺼냈다. 표지 안쪽에는 짧은 메모 두 줄이 있었다.
꽃은 약속한 행동에 반응했다. 직접 하겠다고 맡긴 일은, 대신해주어도 끝나지 않았다.
서린은 공책을 읽고 다시 화분을 봤다.
“이걸 믿으세요?”
태오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봉오리에 가까이 댔다. 닿기 직전, 손을 거뒀다.
“아침엔 따뜻했어요.”
서린이 열쇠를 해주의 손바닥에 돌려놓자 갈색 선이 번지는 것이 멎었다. 납득하기에는 이상했고, 무시하기에는 너무 정확했다.
해주는 열쇠를 꽉 쥐었다.
“혼자 다시 가면 또 못 넣고 올 것 같아요.”
서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호텔이었다. 태오는 천장에서 새는 물을 봤다. 비닐 한쪽이 방금 더 벌어졌고, 양동이 옆으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는 여기부터 막아야 해서.”
서린은 주소를 지도에 넣었다. 빌라에서 호텔까지는 버스로 사십 분. 집 앞에서 또 망설인다면 여섯 시에는 갈 수 없었다.
서린은 전화를 받았다. 여섯 시에는 갈 수 있다고 말하면 됐다. 늘 그랬듯 먼저 된다고 하고, 뒤의 시간은 어떻게든 접으면 됐다.
“오늘 못 갑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예상보다 작아서 한 번 더 말했다.
“죄송해요. 지금 다른 분 구해주세요.”
통화는 금방 끝났다. 서린은 일정표에서 사라진 금액을 잠깐 바라보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태오에게 사진을 마저 찍지 못한 것을 보여줬다. 태오는 남은 화분은 내일 하자며 종이를 접었다.
“같이 걸어갈게요. 넣는 건 직접 하시고요.”
해주의 딸은 온실에서 스무 분쯤 떨어진 빌라에 살았다. 버스를 타려던 해주는 정류장 앞에서 가방을 열었다. 뚜껑 아래에 아직 따뜻한 무 조림이 있었다.
“이것만 문 앞에 두면 안 될까요?”
서린은 괜찮을 거라고 말하려다, 딸이 보냈다는 문장을 다시 보여달라고 했다.
열쇠는 11월 6일에 우편함에만 넣어줘. 그날은 만나지 말자.
그 아래에는 해주가 보낸 답이 있었다.
알았어. 11월 6일 여섯 시까지 내가 직접 넣고 갈게.
서린은 화면을 돌려줬다. 해주는 한참 뒤 가방을 닫았다.
“집에 가져가야겠네요.”
둘은 버스를 놓쳤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걸었다. 해주는 골목 입구에서 숨을 고르고, 빌라 앞에서는 신발 바닥에 묻은 흙을 털었다. 서린은 재촉하지 않으려고 시계를 등 뒤로 돌렸다. 오후 다섯 시 오십사 분이었다.
우편함에는 이름 대신 호수만 적혀 있었다. 해주는 열쇠를 넣을 틈을 손끝으로 짚었다. 손을 떼고, 다시 짚었다.
이 층 창문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저 소리 나면 밥 먹는 건데.”
해주가 거의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웃음을 거뒀다.
“옆집일 수도 있겠네요.”
서린은 조금 떨어져 섰다. 대신 잡아줄 수 있는 손잡이도, 대신 밀어줄 문도 없었다. 흰 벽에 둘의 그림자가 비스듬하게 붙었다.
열쇠가 금속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예상보다 컸다.
해주는 우편함 틈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을 넣으면 닿을 것 같았지만 넣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넣었어’ 세 글자를 쓰고 전송했다. 시계는 다섯 시 오십팔 분이었다.
잠시 뒤 화면에 답이 떴다.
응. 다음에 내가 연락할게.
그 말 뒤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문도 열리지 않았다.
해주는 화면을 끄고 가방을 고쳐 들었다.
“오늘 저녁은 반찬이 많겠어요.”
서린이 먼저 걷기 시작하자 해주도 따라왔다. 모퉁이를 돌 때까지 둘 다 뒤를 보지 않았다.
온실로 돌아왔을 때 태오는 사다리 아래에 앉아 있었다. 젖은 소매를 걷지도 않은 채 작업대를 보고 있었다.
첫 화분에 꽃이 피어 있었다.
은색 꽃잎 다섯 장. 가운데는 작고 둥글게 뚫려 있어서, 정면에서 보면 오래된 열쇠 구멍 같았다. 꽃 아래 온도계가 아홉 도를 가리켰다. 아침에는 네 도였다.
“다섯 시 오십팔 분.” 태오가 말했다. “그때 폈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의 휴대전화에는 서린이 골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시각이 찍혀 있었다.
해주는 한 손을 꽃 앞에 펼쳤다. 손바닥에 아주 희미한 은빛이 비쳤다. 그녀는 꽃을 꺾어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가방에서 보온통을 꺼냈다.
“이건 두 분 드세요. 딸한테는 안 가져갔다고, 누가 물어보면 말해주시고.”
태오가 빈 그릇을 찾는 동안 서린은 남은 화분 수를 셌다. 여섯 개. 가장 안쪽 봉오리 하나는 다른 것보다 작았다. 뒤집힌 이름표 아래로 연필 자국이 비쳤다.
“내일 사진 정리 마저 할 수 있어요?” 태오가 물었다. “내일 일한 시간은 따로 계산할게요.”
서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일정표를 열었다. 오전 칸은 비어 있었다. 오후 일까지 취소할 필요는 없었다.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요.”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작은 화분을 사진에 담으려고 이름표를 돌렸다.
내일은 내가 문을 열게.
그 아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서린.
‘린’의 마지막 획이 길게 올라가 작은 잎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수량표에 적은 것과 같았다. 글자만 지금보다 크고 삐뚤었다. 서린은 이름표 가장자리의 닳은 나무를 손끝으로 짚었다.
그녀는 다시 입구를 보았다. 들어올 때는 지나쳤던, 문 안쪽의 눈금들이 보였다. 아이 키를 재던 선들. 그중 하나 옆에도 같은 잎이 있었다.
문은 안에서는 당겨야 열렸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들고, 온몸을 뒤로 기울이던 감각이 떠올랐다. 저 문이 자기보다 훨씬 무거웠을 때의 감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 반대편에 누가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