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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 03

취소된 공연

봄이 오지 않는 온실 · 3화

악보의 지워진 부분이 남은 부분보다 두꺼웠다.

11월 8일 일요일, 오전 열 시. 서린이 온실 문을 밀었을 때, 여자가 작업대 위에서 지우개 가루를 모으고 있었다. 한 손에는 연필이, 다른 손에는 구겨진 티슈가 들려 있었다. 맞은편 여자는 닫힌 악보 파일 위에 두 손을 얹고 있었다.

“권유진이에요. 전화드렸고요.”

연필을 든 여자가 말했다.

“저는 오민서요.”

두 사람은 서른세 살, 대학에서부터 친구라고 했다. 유진은 악보 위의 박자표를 펴고 민서는 파일을 그대로 두었다. 오늘 오후 작은 공연장에서 함께 세 곡을 연주하기로 했다는 것까지는 같았다.

“하나를 빼면 돼. 첫 곡은 내가 혼자 하고.”

유진이 연필로 곡명을 가렸다.

“노래가 높은 거면 낮출 수 있어. 지난번에도 낮췄잖아.”

민서는 자기 이름이 적힌 안내장을 보았다. 사진 아래에는 ‘오래된 두 사람의 처음 같은 저녁’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를 만지는 손끝이 하얘졌다.

“높아서 못 하는 게 아니야.”

유진의 연필이 멈췄다.

“그럼 뭐가 어려운지 말해줘. 바꿀 수 있는 건 바꿔볼게.”

민서는 한 번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태오는 의자 두 개를 작업대에서 조금 떨어뜨려 놓았다. 첫 화분의 은색 꽃은 그대로였고, 세 번째 봉오리는 접힌 천처럼 주름져 있었다.

이름표에는 두 사람의 글씨가 번갈아 적혀 있었다.

11월 8일 오후 다섯 시, 작은방에서 세 곡을 함께 연주한다.

유진은 건반. 민서는 노래.

“시월에 저희가 같이 적었어요.” 유진이 말했다. “정혜 선생님이 둘 다 하고 싶은 건지 물으셨어요. 그땐 그랬어요.”

민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나도 하고 싶었어.”

그녀가 악보 파일을 열었다. 노래 가사보다 먼저 나온 것은 수정한 공연 소개글이었다. ‘노래를 그만둔 친구를 다시 무대로’라는 문장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것도 지웠잖아. 네가 싫다고 해서.”

“알아. 고쳐줘서 고마워.”

민서는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덮었다.

“그런데 나는 노래를 부르면 계속 그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같아. 가게 마감하고 집에 가는 나 말고. 사람들이 예전에 기대했던 나.”

유진은 지우개를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잘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못해도 된다는 말 말고, 안 해도 되는지 묻고 싶었어.”

바깥에서 바람이 새 덮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안내장의 접힌 부분을 손톱으로 눌렀다. 오늘 공연을 위해 바꾼 근무표가 뒷면에 메모돼 있었다.

“나는 하고 싶어.”

그녀가 말했다.

“우리 둘이 하는 걸 생각하면서 석 달을 준비했어. 이제 그건 못 하는 거네.”

민서는 괜찮은 대답을 찾는 얼굴로 친구를 보았다. 끝내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세 번째 화분을 가운데로 밀려다 멈췄다. 꽃이 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누군가 양보할 것 같았다. 어제 태오가 갈색 봉오리를 따뜻한 데로 옮기던 손이 생각났다. 서린은 화분 대신 두 사람 사이에 물컵을 놓았다.

“밖에서 좀 걸을래요?”

유진이 서린에게 물었다. 민서는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은 온실 밖으로 나가 양동이에서 넘친 물이 말라붙은 바닥에 섰다.

“안 하겠다는 사람한테 하라고 할 수는 없죠.”

그녀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그런데 바로 괜찮다고는 못 하겠어요.”

서린은 어제 남은 수리 자재를 발끝으로 비켜놓았다.

“제가 대신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요.”

유진은 조금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휴대전화에서 공연장 예약 내역을 열었다. 오늘 두 시간 대관, 음향 기사 한 명. 당일 취소라 예약금 이십만 원은 돌아오지 않고, 이미 잡힌 기사 출동비 팔만 원도 내야 했다.

“그래도 이 사람한테는 빨리 연락해야겠네요.”

유진은 먼저 공연장에 전화를 걸었다. 공연을 그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알리고, 열한 시 전에는 둘의 결정을 다시 전하겠다고 했다. 상대는 기다려주겠다고 했지만 비용은 예정대로라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 뒤에 유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온실 안에서는 민서가 이름표를 읽고 있었다. 태오는 전날 찾아둔 공책을 펴놓되 그녀 쪽으로 밀어주지는 않았다. 민서가 무엇이 적혀 있느냐고 묻자, 두 사람이 약속을 끝낸 뒤 씨앗이 남았다는 기록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돼요?”

태오는 봉투를 공책 위에 얹었다.

“이분들한테 있었던 일만 알아요. 꽃을 어떻게 만들려고 결정하실 필요는 없고요.”

민서는 공책을 덮었다. 이름표를 뽑으려던 손도 내려놓았다.

유진이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서린은 물이 떨어지지 않는 바닥에 빈 컵 상자를 내려놓았다. 오늘 정리하기로 한 것은 그 상자 안의 오래된 이름표들이었다. 남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무대에 안 설 거야.”

민서가 말했다.

“네가 괜찮다고 해야 안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 둘이 같이 하기로 한 약속을 어떻게 끝낼지는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신발 끝으로 바닥의 마른 흙을 밀었다.

“오늘만 미루는 거야? 다음 날짜를 잡자는 거면 나는 또 기다릴 것 같아.”

“다음 공연을 약속할 수는 없어. 이번에 우리가 같이 세 곡을 하기로 한 약속은 끝내고 싶어.”

유진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태오의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그는 받으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린도 이름표를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유진이 공연 안내장을 테이블에 놓았다.

“알았어. 11월 8일에 우리가 같이 세 곡을 하기로 한 약속은 여기서 끝내자. 나는 동의해.”

그녀는 친구를 보았다.

“나중에 이걸 빚처럼 꺼내지 않을게. 그렇지만 오늘은 속상해.”

“나도 그 약속을 끝내는 데 동의해.”

민서가 말했다.

“오늘 속상한 건 없던 일로 해달라고 안 할게.”

두 사람은 다음 날짜를 적지 않았다. 연필은 안내장 위에 가로로 놓였다.

세 번째 봉오리 끝이 풀렸다. 민서가 숨을 들이켰다. 꽃잎처럼 보였던 것은 얇은 껍질이었다. 그것이 벌어지며 작은 씨앗 하나가 흙 위에 떨어졌다. 마른 단추가 떨어지는 정도의 소리였다.

서린은 온도계를 보았다. 아까와 같은 일곱 도였다.

유진은 꽃이 없는 줄기를 손대지 않고 들여다봤다. 민서도 그 옆에 섰다. 누군가 웃어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럼 공연장에는 취소한다고 말할게.”

유진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민서는 부탁 하나를 덧붙였다.

“아파서 못 나온다고 하지 말아줘. 아픈 건 아니니까.”

유진은 잠깐 생각한 뒤 전화했다. 두 사람의 사정으로 공동 공연을 취소한다. 예약금이 반환되지 않는 것과 기사 비용이 남는 것도 확인했다. 통화가 끝난 뒤 달력에서 공연 표시를 지웠다.

화면에서 지우는 데는 손가락 두 번이면 됐다. 연락해야 할 사람은 열여섯 명이었다.

민서는 관객들에게 보낼 문장을 썼다. 함께 결정해 오늘 공연을 취소한다는 내용과 헛걸음을 막으려는 사과를 넣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하거나 유진이 이해해주었다고 쓰지는 않았다. 유진이 읽고 두 군데를 고쳤다. 둘은 각자 초대한 사람들에게 보냈다.

“이십팔만 원은 내가 낼게.” 민서가 말했다.

유진은 계산기를 켰다. 이미 둘이 십만 원씩 낸 예약금과 아직 낼 팔만 원이 따로 적혔다.

“예약금은 원래 같이 쓰기로 한 돈이잖아. 그건 그대로 두고, 기사 비용만 반씩 더 내자.”

“그래도 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민서는 유진에게 사만 원을 보냈다. 유진은 자기 몫을 보태 팔만 원을 공연장에 송금했다. 휴대전화의 숫자들은 씨앗이 남기 전과 같은 값이었다.

열 시 오십이 분. 서린은 닦은 이름표 스무 장을 상자에 넣었다. 태오는 작은 빈 봉투를 가져왔다. 어느 이름을 먼저 쓸지 망설이다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유진과 민서는 자기 이름을 나란히 썼다. 그 아래에는 11월 8일, 함께 종료라고 적었다. 태오는 씨앗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종이를 접어 받았다. 공책에 있던 오래된 씨앗과 섞이지 않게 봉투를 따로 두었다.

“오늘 끝낸 건 이거예요.”

민서가 공연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악보를 챙겼다.

“저녁은 혼자 있을래.”

민서가 같이 있자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응.”

유진은 먼저 문을 당겨 나갔다. 민서는 파일을 가방에 넣고 뒤따랐다. 둘의 걸음이 같은 방향으로 가다가 골목 끝에서 갈라졌다. 그 뒤의 일은 온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태오는 꽃이 없는 세 번째 화분을 두 번째 화분 옆에 놓았다. 씨앗 봉투에 적힌 두 이름을 보고, 자기 화분의 이름표를 보았다. 손이 공책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서린은 남은 칸에 적었다. 꽃 하나. 씨앗 하나. 닫힌 봉오리 다섯.

“씨앗은 어디다 두죠?”

태오는 인수 목록에 없는 작은 나무 선반을 봤다. 아래칸 한쪽을 비우고 봉투를 세워놓았다.

정각 열한 시, 서린은 걸레를 빨아 널었다. 선반에는 꽃 한 송이 놓을 자리보다 작은 틈이 생겨 있었다. 꽃이 아닌 것도 그곳에 남아도 되는지는, 이제부터 둘이 정해야 했다.

3화의 인물과 단서 다시 보기 · 스포일러 포함

이 회차에서 만난 인물과 단서만 모았어요.

취소에도 남는 비용
당일 취소로 예약금 20만 원과 기사 출동비 8만 원이 든다. 두 사람은 이미 낸 예약금과 추가 비용을 각각 절반씩 부담한다.본문의 해당 장면으로 이동
씨앗은 다른 결말
두 사람의 확인 뒤 봉오리는 씨앗으로 남고, 온도는 7도 그대로다. 약속의 종료가 개화와 같은 결과를 주지는 않는다.본문의 해당 장면으로 이동
두 사람이 직접 쓴 종료
유진과 민서는 이름과 날짜를 남긴다. 약속을 끝내는 데 동의해도 서운함과 관계의 문제까지 즉시 사라지지는 않는다.본문의 해당 장면으로 이동

3화 끝

함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화 준비 중 · 새로운 회차는 이곳에서 이어집니다.